‡‡ Rod of Asclepius ‡‡
2011.4.11 마라톤 후기 본문
전날 이틀동안 학회를 다녀오느라 많이 피곤했지만 신선한 아침 공기에 전날의 피로가 가시는 것 같았다.
이전부터 마라톤 대회에 나간다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아침에 일어나보나 마음이 무거운 것이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겠나는 걱정이 앞섰다. 평소에 아침을 잘 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늘은 힘을 내야 하는 날! 간단하게 홀로 아침을 챙겨먹고 택시를 타고 목적지인 국채보상공원으로 향했다.
나에게 오래달리기는 머리를 감싸쥐게 하는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학창시절부터 오래 달리기를 할 때 페이스 조절을 잘 하지 못해서 금새 지쳤고 다른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항상 한두바퀴씩 뒤쳐졌다. 그 이후 따로 오래달리기를 해 본 적도 없었고, 지금은 오히려 학창시절보다 체력도 떨어지고 몸에 살도 많이 붙은 상태로 어찌보면 참 심각한 상황인 것 같다. 더군다나 팀으로 달리기 때문에 제한 시간 내에 들어와야 하는데, 내가 팀의 발목을 붙잡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회진을 돌 때 계단으로 2층 정도만 올라가면 숨이 찬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나를 보고 무언가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내 두 발로 목적지까지 가지 못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조언도 있고 해서 3주 전부터 조금씩 병원 뒤 운동장을 걷고 뛰면서 단련을 했고, 1주 전부터는 식사조절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였다. 결국 마라톤을 뛸 때 쯤의 나는 평소보다 체중이 5kg 정도 줄었었고, 뱃살도 조금 사라졌다. 조금이지만 변화된 내 모습을 보면서 작은 기대감을 가졌다. 조금 힘들겠지만 완주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른 시간이라 길이 뻥 뚫려 있었다. 택시를 타고 여덟시 이십분 쯤 국채보상공원 인근의 공터에 도착했다. 우리 팀은 이미 몇몇이 먼저 도착하여 서로를 반기고 있었다. 총 16명이 이번에 '영남대학교 의료원 신경과'의 이름으로 등록을 했고 우리의 목표는 1시간 30분 내 완주 하는 것. 모두 기합을 팍팍 넣고 옷을 잘 차려입고 온 것을 보고 나도 힘을 내야겠다고 또 다짐했다.
짐을 맏기고 출발선상으로 걸었다. 우리가 참여한 10km 코스는 정확하게 몇명이 참여했는지 파악이 안될 정도로 엄청나게 사람이 많았다. 출발선상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콩나물 시루에 가득찬 콩나물처럼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있었다. 모이자마자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마스터즈 코스가 먼저 출발한 다음 약간 간격을 두고 출발을 해야 서로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서서 주변 구경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이번 행사에 참여를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름이 낮익은 병원 마크를 달고 온 무리들도 보이고, 보험회사, 의료점, 은행 등 다양한 회사 및 상점가의 직원들도 참가한 모양이다. 또한 대구에서 멀리 떨어진 인천, 경기, 경북 북부 지방 등지의 많은 마라톤 동호회 사람들도 참여를 했다. 남녀 합해서 4만명 쯤 되려나? 많은 사람들이 좁은 출발선상에 모여 서서 귀를 기울여 출발신호를 듣기 위해 한마음으로 긴장하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과 함께 사람 구경을 하다보니 어느새 펑 소리와 함께 출발신호가 떨어졌다. 낮이라 그런지 붗꽃 발사 소리만 요란하게 들리고 불꽃은 잘 보이지 않았다. 신호와 함께 조금씩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많이 모여 있어서 그런지 천천히 출발선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진행자가 출발하는 사람들의 소속을 불러주면서 힘내라고 응원을 해 주었는데, 우리 앞에는 꽤 많은 사람들과 팀이 서 있는 모양인지 출발선까지 도착하는데만 10분 정도는 걸렸던 것 같다.
열시 쯤 본격적으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의 간격도 조금씩 벌어지면서 부딪치지 않고 속도를 내서 뛸 수 있게 되었다. 초반에는 우리 팀과 페이스를 맞추어서 뛰었는데 전부 열심히 잘 뛰어가는 것 같아서 왠지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다를까 전날 피로가 조금 덜 풀렸는지 10분 쯤 뛰었을 때 양 허벅지 쪽에 살짝 쥐가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 신경을 쓰다 보니 왠지 숨도 차는 것 같고 속도를 많이 낼 수 도 없어서 우리 팀의 페이스에 맞춰서 뛰기 힘들어졌다. 점차 멀어져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제 나 혼자 뛰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의 외로움과 조금의 안도감이 들었다. 내 페이스 대로 뛰어간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초반에 팀의 페이스에 맞춰 열심히 뛰다 보니 주변을 잘 볼 수 없었는데, 조금 속도를 늦추고 고개를 들고 달리다보니 이전에 신경써서 보지 못했던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소에 차를 타고 자주 지나다니는 이 도로가 오늘은 왜이렇게 신선하게 보이는지. 평소 보지 못했던 신기한 가게들과 건물의 모습, 심지어는 벽에 쓰여진 낙서 조차도 재미있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내가 생각하는 이런 기분을 즐기고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일부는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즐겁고 신나는 생각을 재미있어 할 때 쯤 숨이 점점 차기 시작했다.
목이 바짝바짝 마르고 발바닥은 뜨거워졌다. 등줄기의 근육들이 긴장한 모양인지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사람들 참 체력도 좋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나의 체력이 평균보다 떨어지는 모양인가보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나가면서 내 발걸음도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코스 주위에는 자원봉사차 나와 있는 학생들이 열심히 뛰라고 응원을 열심히 해 주었지만 힘이 드는 건 어쩔수 없는 모양이다.
배수대가 보이며 사람들이 물을 마시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낼름 달려가서 물 한 컵을 마시고 기운을 내서 열심히 뛰었다. 반환점을 1km쯤 남겨두었을 때 벌써 선두의 사람들이 반대편 도로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중앙 분리대를 중심으로 나뉘어지는 무리를 보면서 나쁜 마음이 생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정정당당하게 끝까지 뛰어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힘들지만 조금 더 열심히 달렸다. 달리다보니 우리 팀도 길 건너편에 있는 것을 보았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내 주변 사람들도 대단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0km 코스의 1위를 차지한 여성분의 기록이 37분대였다고 하니 내가 평균보다 못한건지, 대단한 사람들이 많은건지...
반환점의 삑 소리에 기운이 나서 조금 더 힘내서 달려보기로 했다. 목표가 보이지 않는 것 보다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 좀 더 쉬운 법이다. 내가 목표로 한 양의 절반이나 이미 달려왔으니 절반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5km나 남았다는 사실에 절망하기 보다는 5km밖에 남지 않았다고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는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좀 더 건설적이다. 이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2km 가량을 뛰고 걸으며 도착점과 나 사이의 거리를 많이 줄여갔다. 이전까지 뛰었던 길에 큰 오르막이나 내리막길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있었는데, 어느새 길다란 오르막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말 도저히 뛰어서 오르막을 오를 수는 없어서 빠른 걸음으로 바꾸어서 열심히 오르막을 타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보였다. 비슷비슷한 속도와 체력을 가지고 오래 같이 달린 사람들이기에 친해질법도 하건만 서로 많이 힘들어서인지 이야기를 해 볼 기회는 없었다. 나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오르막길이 모두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빨리 걷기는 내 나름대로 자신있다고 생각해서 이때 조금 앞질러 보자는 생각으로 빨리 걷기에 총력을 다시 기울였다. 그 결과 내 근육이 버틸 수 있는 한계선을 넘었는지 엉덩이부터 발목까지의 근육에 모조리 쥐가 났다.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평소에 느껴보지 못했던 근육들의 수축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오르막길도 한 구간 뿐이면 좋았겠지만 총 두 구간 정도로 꽤 많은 거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이때쯤이 내 최고의 한계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엠블런스가 앞쪽에 있는 사람을 싣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저기 타서 도착점까지 가면 좋겠다는 달콤한 생각을 잠시 했지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겠다는 마음에 낑낑거리면서 걸었다. 이미 주변의 사람들이나 풍경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 정말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Runner's high' 같은 현상을 겪어보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몸만 힘들고 즐겁거나 황홀한 느낌은 오지 않아 아쉬운 감도 들었다.
마지막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스퍼트를 하기 시작했다. 펄펄한 고등학생 무리가 학교 이름을 열심히 외치고 뛰어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들어갈 뻔 했지만 저 멀리 고지가눈앞에 보이는데 자칫 무리를 해서 쓰러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 조급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면서 끝까지 조금 걷고 달리고를 반복하였다. 어느새 풍악소리와 함께 도착점이 몇백 미터 앞으로 다가왔고, 저 선만 넘으면 내가 오늘 목표로 한 일은 끝나겠구나 하는 마음에 마음이 조금씩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기록을 측정하는 삑 소리와 함께 도착점을 통과하였다. 정말 그 자리에 쓰러지고 싶었지만 먼저 도착한 우리 팀을 찾아가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해서 터벅터벅 처음의 소집 장소로 걸었다. 정말 힘들었지만 마음은 개운했다. 미리 우리 팀들이 앉아서 쉬고 있던 곳에 도착하자 사람들의 가벼운 환호와 과장님의 포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등산에서 보인 나의 질 나쁜 체력을 생각하였을 때 완주를 해낸 것 자체가 나 자신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주자에게만 주는 금빛 메달을 보니 이건 정말 방 한 켠에 조심스레 장식을 해 둘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노력의 결실. 반짝거리는 내 기분 같이 반짝반짝거리는 메달이 너무 예뻤다.
비록 1시간 37분으로 목표 시간보다 7분 늦게 도착해서 우리 팀의 목표를 좌절시켰다는 점이 참으로 죄송하고 송구스럽지만 이번 마라톤으로 느낀 점이 많았다. 우선 내 한계에 대해 다시 한번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고 이 질이 낮은 체력을 좀 더 나아지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느꼈다. 내가 만약 몇 달 전부터 미리 운동을 좀 해뒀더라면 7분 정도는 당길 수 있었을 것이니까. 그리고 무슨 일이든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자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비록 과정은 힘들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은 없는 법이고, 그 마지막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이번 마라톤을 통해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4월 11일은 무척 힘들었지만 보람찬 날로 내 인생에 기억될 것이다.